본문 바로가기
믿음의 길

죄를 벗고 의의 옷을입는 존재론적 딜레마

by 사통팔달 주막집 2017. 12. 20.

죄를 벗고 의의 옷을입는 존재론적 딜레마




Free stock photo of art, architecture, church, religion




가끔 인사 청문회를 지켜보면 저명한 분들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 볼 때가 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회적 명망가일수록 그 인격이나 도덕성에 거품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이 나를 세워 놓고 털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옆에서 남이 모르던 나의 죄를 고자질하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이 추궁하신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막연한 공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끝, 전 인류가 말실수 하나까지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천국 청문회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자리에 서게 될 터인데 어떻게 견디어 낼까요? 토지 투기나 위장 전입 정도면 차라리 다행일 것입니다. 천국 청문회에서는 오만 가지 죄가 다 드러날 터인데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하느님은 인류 가운데 얼마를 택하셔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삼으시되, 거룩하고 온전한 하느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아들로 삼기로 계획하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죄라는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 그 누구도 아들로 삼을 수 없을뿐더러 아들로 삼았다해도 하느님과 진정한 부자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입장에서 죄 문제는 반드시, 완전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인간을 도덕적 주체자로 만드셨습니다. 말을 좀 바꾸면, 독자적으로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에 거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조상 아담은 하느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쪽으로 자유의지를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타락했다는 말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의지가 아주 약해지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의지가 아주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인류는 아담을 따라서 허물과 죄로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을 행할 의지는 제 기능을 못하고, 악을 행할 의지만 남아 공중의 권세잡은 사탄이 시키는데로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사탄은 우리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여 무엇이든지 욕심대로 행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아를 가장 우선시하고, 중요시 여기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에 나를 앉히려고 합니다. 나 자신이 우상이 되어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 대로 하려고 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삶에서 가장 소중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자신을 앉혀 놓고 살고 싶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지, 실제로 이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존재론적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하느님은 절대선입니다. 만일 절대선이신 하느님이 이 우주를 다스리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쓴다 해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전대악인 사탄이 다스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모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절재선인 하느님이 우주를 다스시려야 합니다. 그런데 절대선이신 하느님이 우주를 다스리신다면 날마다 죄를 범하는 우리는 하느님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자연적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없는 아주 묘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제일 멀리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빠진 우리의 딜레마인 것입니다. 절대선이신 하느님 앞에 선 죄인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옥한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