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벗고 의의 옷을입는 존재론적 딜레마
가끔 인사 청문회를 지켜보면 저명한 분들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 볼 때가 있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회적 명망가일수록 그 인격이나 도덕성에 거품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이 나를 세워 놓고 털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탄이 옆에서 남이 모르던 나의 죄를 고자질하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이 추궁하신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막연한 공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끝, 전 인류가 말실수 하나까지도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천국 청문회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자리에 서게 될 터인데 어떻게 견디어 낼까요? 토지 투기나 위장 전입 정도면 차라리 다행일 것입니다. 천국 청문회에서는 오만 가지 죄가 다 드러날 터인데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하느님은 인류 가운데 얼마를 택하셔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삼으시되, 거룩하고 온전한 하느님처럼 흠과 티가 없는 아들로 삼기로 계획하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죄라는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 그 누구도 아들로 삼을 수 없을뿐더러 아들로 삼았다해도 하느님과 진정한 부자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입장에서 죄 문제는 반드시, 완전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인간을 도덕적 주체자로 만드셨습니다. 말을 좀 바꾸면, 독자적으로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에 거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조상 아담은 하느님께 순종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쪽으로 자유의지를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타락했다는 말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의지가 아주 약해지고 하느님을 거역하는 의지가 아주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인류는 아담을 따라서 허물과 죄로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을 행할 의지는 제 기능을 못하고, 악을 행할 의지만 남아 공중의 권세잡은 사탄이 시키는데로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것이 죄에 빠진 우리의 딜레마인 것입니다. 절대선이신 하느님 앞에 선 죄인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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