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해서 믿음이 있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 삶을 사는 이유
우리는 앞서 복음을 알게 되면 정죄감이 없고,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게 되어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행동양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6장 12절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참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꼭 이뤄져야 할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았다” “깨달아졌다”라는 표현들을 많이 씁니다. 실제로 복음은 깨달을 수 있고, 밝아질 수 있으며, 복음에 대해서 확실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복음을 깨닫고,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해서 담대한 믿음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내가 복음으로 알았다”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머리로 알았을 뿐이지 가슴에서 밝아지지 않고, 마음에 와 닿지 않은 것을 수도 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에서 밝아진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 이미 알게 되었어도 온전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복음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복음이 이론이 되어서는 안 되고, 복음이 내 가슴에서 밝아져야 된다는 것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머리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밝아진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복음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갖고 있으며, 더 이상 밝아 질수 없을 만큼 아주 밝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데,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분명한 확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선포하고 담대하게 선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의 삶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되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뭔가 정체 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 느낌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눔의 시간에서 선포되어진 메시지에 관해서 나누고 있고, 확신하고 있고, 복음을 알고 깨달은 사람이고, 복음적인 사람입니다. 그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적극적으로 몸된 교회를 섬기고, 지체를 섬기는 행동을 보면, 의심의 여지를 살수 없을 만큼 “복음을 안다”고 자타가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데, 왠지 모르게 “저 사람이 변화되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저것이 혹시 성격이 아닌가? 기질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변화는 일어났지만, 그 이후에 진보는 일어나지 않고, “진행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을만한 그런 지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의 진보를 나타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딤전 4:15)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는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의 진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즉, 이 진보는 본인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식구와 자신의 몸된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은 그가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보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무르고 있다는 느낌,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지체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분명히 복음을 잘 알고 있고, 깨닫고 있고, 복음에 대해서 선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어느 정도의 변화 이후에 더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드림까지 나가야 한다
오늘 본문에 해답이 있습니다. 6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수식어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앞에 있는 내용을 받아서 새로운 주제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12절의 “그러므로”라는 것은 11절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롬 6:11)
바울은 너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이러한 여김을 받아서 “그러므로” 12절의 내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분명한 여김이 자신 안에 이뤄져 있으며, 동일시와 의식화가 이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이 여김이 근거가 되어져서 12절과 13절의 드림까지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여겼으므로, 드리라”라는 말인 것입니다. “알았으면 여기고, 여겼으면 드리라”라는 논리 순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중에 로마서는 교리서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교리적인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실제와 실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 6장에서 이야기 하는 성화의 근거가 되는 내용에 확신을 가지고, 그 사실이 내 안에서 여김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이것이 되지 않으면 참된 성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겨졌다고 해서 “나는 온전한 성화가 이뤄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제가 복음주의자들과 교제를 나누다보면, 이 복음주의자들 안에서 뭔가 오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사실에 대한 이야길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보았다. 깨달았다. 나는 몰랐는데, 예수와 함께 죽었다. 이 사실이 놀랍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실이 내 안에서 밝아져서 매 순간마다 내가 죽은 자로 여기고 있다.”라는 놀라운 복음에 관한 내용들을 많이 나누고 있는데, 정작 그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거기서 성령을 쫓아 행하는 이 과정으로 가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무엇인지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로마서 6장에 대해서 매우 밝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자들이 빠져 들어가는 함정인 로마서 7장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봅니다. 율법주의자 부류의 사람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7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복음을 깨달았는데도 7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복음을 모르니까 그런다고 볼 수 있겠지만, 복음을 알고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정작은 보면 7장의 모습이 그의 삶의 모습에서 보입니다. 한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진보하는 발전적인 신앙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드림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는 복음이 밝아지고, 깨달아서, 여김이 이뤄졌다면 그것으로 다된 것이 아닙니다. 여김이 내 안에서 밝아졌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바로 여기서 끝냅니다. 밝아졌다는 것에서만 박수를 칩니다.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고, 의에 대해서 산자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렇게 복음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복음으로 인해 굉장히 즐거워하는데, 결국 그 사실을 나누는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을 뿐, 그 사실이 자신의 삶속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변화에 대한 간증이 나타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죽음과 밝아짐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의 성도님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런 삶에 머물러 있는듯합니다. 30년 전에 그분들이나, 30년 후에 그 분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언제나 복음의 사실에 관한 이야기들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이뤄진 복음의 내용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어떻게 밝아졌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데, “그 복음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변화시켰느냐?”라고 물어보면 “성화는 점진적이다”라고만 대답합니다. “성화는 훈련을 통해서 연단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만 30년 동안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화의 복음을 깨달았음에도, 그 성화가 우리 삶의 실제로 나타나기 위해 환경과 사건을 통해서 빚어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복음의 원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로마서 6장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다룬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예수님 안에 연합된 죽음을 알지 못해도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내 고집을 꺾으려고 하신다. 그래서 주님이 저 사람을 동원하셨다”하는 것을 잘 압니다. 실제로 내 안에 혈기를 그리스도로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 혈기부리는 나를 박살내십니다. 내 속에서 화가 나면 날수록, 나 스스로가 고통 속에 빠지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동원하십니다. 그렇게 환경으로 인해서 깎이고, 다듬어지고, 꺾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을 성화라고 한다면, 우리가 성화의 복음을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화의 원리를 몰라도 예수 믿은지 오래되면,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수준으로 빚어 가십니다. 환경과 사건과 존재들을 통해서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원리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 강제로 우리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환경을 통해서 다듬어지고, 부셔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성화되도록 하는데, 한 방편으로 사용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핵심원리는 아닙니다. 성화의 핵심원리는 복음이 내 삶속에서 적용되어져서 나타나는 해방이어야 합니다. 환경 때문에 마지못해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참된 해방을 외치는 것이 참된 성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깨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성화의 삶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복음이 11절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사실이 밝아지는 은혜의 축복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나의 몫이 있습니다. 성화의 복음의 원리 가운데에 “앎”과 “여김”이라는 은혜의 단계가 있는가 하면, 다음에는 “드림”과 “성령을 쫓아 행함”이라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협력적 사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행의 영역이 있는가 하면 알고 깨닫는 이해의 영역이 있고, 알고 깨닫는 이해의 영역이 있는가 하면 깨달은 사실을 근거로 하는 실행과 실천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실천은 율법적 개념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 아는 것인양 생각을 합니다. 즉, 복음의 영역 속에 사람이 해야 된다는 몫은 복음의 영역이 아닌 것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도 조건적인 부분이 있다
어떤 목사님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할 때, 이 믿음조차도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하며 믿음이 구원의 조건으로 된다면 이것 또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되면, 그것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행위와 믿음의 개념을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성경은 행위와 믿음을 분리를 시켰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조건. 즉, 믿음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것이 행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인과률”이라고 스스로 표현을 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야,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이 믿음조차도 내 안에 의지적 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서 우리 안에서 일으켜 놓은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를 100% 절대 주권 섭리의 영역으로 넣어놓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들을 0%라고 하는 것이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극단적인 칼비니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주의자 안에서도 율법의 개념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밝아져야 된다” 또는 “깨달아야 져야 된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대부분 피동적 표현을 많이 쓰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있는 능동적인 수고와 노력은 그것은 다 율법이다. 깨닫기 위해 애쓰지도 말고, 발견하려고 애쓰지 말고, 세월이 지나면 언젠가 밝아지고 언젠가 깨달아 진다. 언젠가 밝아지면 내 삶 속에 내 생활로 연결이 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극단적 복음주의입니다. 믿음과 순종조차도, 행위의 영역 속의 사람의 수고와 노력의 영역으로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반대말은 “사람의 힘과 수고와 노력으로 이뤄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율법이요,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이 제시한 바를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바를 우리가 따라야 되는 순종을 일컬어 율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통로요, 수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믿음은 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조건적인 것을 율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왜곡시킨 것 입니다. 은혜의 개념을 잘못 이야기 한 것 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뤄놓으신 어떠한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뤄놓으신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뤄놓으신 일들을 은혜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받는 것을 믿음이요,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철저하게 조건적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조건이 한 번도 제시되지 않는 적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조건입니다.
성경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합니다. 구원을 얻는 조건은 주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모든 공로와 업적은 하나님의 공로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이 은혜의 선물을 우리가 받는 것이 조건입니다. “믿으라”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조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원리 안에는 순종의 원리가 항상 전제되어 있습니다. 순종은 율법의 영역이 아니고, 사람의 행위와 수고의 영역이 아닌 것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이루기 위한 수단과 통로입니다.
복음에는 “율법적이지 않은 드림”의 영역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화의 복음 속에서 은혜의 영역이 예수님 안에서 이뤄진 연합이라면,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 것,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드림과 그에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는 바를 행하고 순종하는 영역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까지가 복음입니다. 이 부분이 빠진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빠뜨린 사람들은 복음의 사실들만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30년 혹은 40년 동안 복음의 사실만 가지고 이야기 할 뿐, 복음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변화를 가져오는지는 말하지 못합니다. 고작 환경과 사건을 통해서 다뤄진 일을 이야기 할 뿐이지요. 그러나 사건과 환경을 통해서 다뤄지는 일들은 복음을 전혀 몰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 겸손하게 만들고 온유하게 만드는 일들은 환경을 통해서 사람을 한번 꺾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야곱의 환도 뼈를 꺾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개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이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되는데 있어서, 바로 알고 깨달은 이후에는 “드림의 영역”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다음순서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지체를 통해서 주님께서 나를 주관하고 운행하여 주소서.”라고, 더 이상 내가 주관자가 되지 않고 주님께서 주관자가 되도록 내 자신을 내어 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드림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정체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밝음뿐만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주재권 양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누구보다도 밝히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신앙의 진보가 일어나지 않고 실제로 열매가 맺혀지는 일이 안 일어난다면, 그는 드림과 행함에 대한 사람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의에 대해서 산자라고 하면, 이제 내 지체를 의를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와 성령께 내 지체를 내어 놓으며,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나의 모든 온 몸을 주님께서 어거하시고, 주님께서 사용 하소서”라고 주님께로 양도하는 것이 매순간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었고 의에 대해서 산자가 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고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어떤 로봇이 있습니다. 이 로봇은 총알 공격에도 죽지 않고, 적들을 한방에 무찌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 그런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다, 의에 대해서 살았다”라고 한다는 것은 내가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내 안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감에 있어서, 그 삶의 방식은 내 자신을 내어 놓고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주관해서 사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체성 인식만으로 모든 실행까지 저절로 이뤄지는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의 사실에 대해서는 앵무새처럼 반복해 말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참된 변화의 영역들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옛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노력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나를 양도하는 자기 부인”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것은 물론 복음의 사실이 전제된 가운데 자기 부인을 말합니다. 옛사람을 극복하는 자기 부인과 이제 내가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살도록 내 자신을 내어놓는 자기 부인과는 다릅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율법적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니까, 율법적 개념에서의 자기 부인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복음적 개념의 자기 부인조차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깨달아 버립니다. “자기 부인은 할 필요조차도 없다. 자기가 부인할 자기는 옛사람에서 죽었기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입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이 사실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 내면적으로 일어나는 소극적 영역이 있다면, 내 안에서 이해하고 확보되어지는 정체성 안에서 적극성을 띄고 내 자신을 드리고 행하는 적극적인 영역 또한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적극적 영역이 우리에게 현실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될 복음의 실제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기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복음을 깨닫는 과정 속에서 무엇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복음의 원리 안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드림이요,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라는 것은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내 노력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내가 이루려고 하는 열심은 끝나야 하지만, 내가 거룩해지려고 하는 내 수고와 노력은 끝나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 아래서 거룩해지려고 하는 수고와 노력은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요구는 여전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요구로서 우리 안에서 요구하고 이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가운데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주님께 순간 순간 인정하고 드리세요. “주님 이 문제에 대해서 주권자는 당신입니다. 이 문제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저는 내 생각과 의견이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속에 당신의 생각을 말하고, 내 마음속에 당신의 마음을 넣어주시고, 내 의지 속에 당신의 의지를 불어넣으셔서, 주님께서 직접 주관해주세요”하고, 내 자신을 주님께 양도하는 과정들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 비유를 통해서 보는 순종과 드림의 문제
이제 우리에게는 “그 복음이 무엇이냐?”하는 것 보다는 “그 복음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어지고 이뤄지게 될 것이냐?”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영역에 우리의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끌고 가려고 하는 수고는 끝나야 합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끌거나 민다고 해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야 하는데, 우리가 자동차를 끌거나 밀고 가려고 하면 어리석습니다. 또 자동차가 눈앞에 있는데도, 걸어서 가려고 하는 것도 어리석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수고와 노력은 끝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그 차를 끌거나 밀 때, 강력한 슈퍼맨이 되어서 그것을 끌거나 밀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차에 타서 이제 운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운전은 내 조작이 있어야 합니다. 시동을 켜고, 클러치를 밟아서, 기아를 변속하고, 악셀을 밟아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는 동안에 계속해서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해야 합니다. 이것조차 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운전하는 노력”과 “차를 끄는 노력”은 본질적으로 전혀 틀린 것입니다. 또 “차 없이 걸어서 부산까지 가려고 하는 수고” 또한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끝장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용차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부터 그것을 받았으니까, 앉아 있기만 하면 저절로 움직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이 차를 운전하는 조작과 노력은 운전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 운전하는 것을 믿음과 노력에 따른 순종이라고 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차를 운전하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지, 차를 밀거나 걸어서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수고와 노력이 아닙니다.
은혜의 영역 안에서의 드림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여겼음으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알고 여기고 드리는 이 행위는 법아래 있는 행위가 아니고, 은혜 아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드림은 은혜의 영역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무관한 법아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아래에도 행동이 있습니다. 이 은혜 아래 있는 행동은 내가 화를 안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행하게 하도록 내 자신을 양도하고, 성령이 우리를 이끄실 때에 이끄심에 따라서 순종하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화를 내가 처리하려고 하거나,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죄 본능에 따른 법아래 있는 수고와 노력이지만, 성령을 쫓아서 내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일, 그리고 성령이 주관할 때에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들은 은혜 아래 있는 행위입니다. 법아래 있는 행위와 은혜아래 있는 행위들을 여러분이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분되어져야 되고, 이것이 구분될 때에 은혜 아래 있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행동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믿음의 수고와 노력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은혜 아래서의 수고와 노력을 말하는데, 복음주의자들이 너무 은혜를 강조하다보니까, 은혜 속에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조건이 되면 은혜가 안 되고, 더군다나 인간이 순종함으로 어떤 일이 이뤄진다고 하면 그것도 은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정말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서야 될 곳에서 서지 못하고, 너무 멀리 간 것입니다.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이 한정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을 은혜라고 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 또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조차도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해 놓은 것이 은혜이고, 그것은 율법이나 법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주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주님이 주관하여 주세요. 이 일 가운데 저의 능력과 모든 행동을 주관해 주세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필요합니다. 토기장이가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토기장이 손에 진흙이 올려지지 않는다면, 토기장이는 결코 토기를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주어질 때, 비로소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병도, 항아리도, 접시도, 컵도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우리 자신을 주님께 양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강재하지 않는 분입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도 하나님이 지켜보신 이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왜 죄를 짓는 것을 막지 못했을까? 그것은 처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인간이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다”라는 시스템 구조를 설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고, 그 책임을 인간이 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이 반드시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라, 복음 할아버지가 되어도 인간이 해야 할 영역은 있습니다. 이 영역은 “율법이냐? 은혜냐?”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태도와 자세의 문제이지, 이것을 “법아래 있느냐? 은혜 아래 있느냐?”하고 따진다면 그 자체가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이 우리 안에서 운행되도록,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지체를 그분께 양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자로 여기고, 그 여김 안에서 죄를 위해서 나는 더 이상 쓰일 일이 없고 의를 위해서 쓰여져야 된다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의의 병기로 써주세요.”라는 적극적인 양도의 표시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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