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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길

십자가의 도 (제씨 펜 루이스)

by 사통팔달 주막집 2017. 9. 22.

십자가의 도 (제씨 펜 루이스)



 

십자가와 부활과 생명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2:12)

 

마비 박사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에 관한 말씀 가운데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진리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각각 다른 면을 보이고 있지만,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일치를 이루고 있다.”


이 말은 매우 분명하고 참된 진술이긴 하지만, 경험적인 차원에서 또 가르치는 관점에서 볼 때 자칫하면 두 두 가지 사역에 똑같은 비중을 두지 못할 위험이 있다.

죽음과 부활, 이 양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영적 삶은 영향을 받게 된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하지 않고는 긍정적인 면에서의 영적인 생명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부정적인 죽음의 진리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실제적으로 영적인 죽음 가운데 빠져 삶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도 반대로 긍정적인 부활의 생명만을 주장하다 보면 옛 아담의 본성적인 생명을 처리할 수 있는 죽음의 역사가 상실되어, 우리 안에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기 원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게 된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처리될 때에만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의 살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생명, 갈보리와 부활, 이 두 가지 진리는 똑같이 강조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양면성을 띠고 있음을 기억하자.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믿음 안에서 우리가 체험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성령과 동역하여 부정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삶 가운데 적용하는 것만큼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


죽음과 부활의 양면적이면서도 하나를 이루는 오묘한 진리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한쪽에 치우쳐 있다.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면에 치우쳐서 항상 어두운 영적인 죽음에 거하므로 삶의 역동력을 상실하고, 도 다른 이들은 죽음을 너무 강조하는 부정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영적인 삶의 긍정적인 면에만 거하려 하기 때문에 본성적인 옛 삶이 남아서 지배력을 행사할 위험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처리되지 못한 자연인의 옛 생명을 마치 부활의 생명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적인 생명을 진정 부여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영적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게 마련이다. 이런 위험성을 깨닫고 하느님이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균형을 이루게 된다.


또한 우리가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이런 영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인정할 때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과정에서 덜 교리적이고 독단적이게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진리가 성경 말씀 가운데 들어 있다는 사실은 믿지만, 그 쓰여진 모든 말씀의 의미를 다 안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혼과 영의 분리




이제 로마서 6:10-11로 가서 십자가의 죽음의 측면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주어진 생명의 측면에서 주님과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느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태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0-11)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여기십시오. 이제 죄는 여러분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어로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모국어로 말씀하시며, 여러분은 그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 속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생명에 이르는 열쇠가 들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그리스도 안에서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느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느님께 드리라.”(13) 말씀하는데, 그렇다면 부활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논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여러분은 삶의 길을 정할 때, 죄에게는 단 한 표의 권한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거들떠보지도 마십시오. 그런 옛 방식의 삶이라면 잔심부름도 거절하십시오. 대신 여러분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시간을 들여 하느님의 길에 헌신하십시오. 여러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진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죄가 시키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그 옛 폭군의 지배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유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로마서 7:4을 찾아보자.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느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법에 얽매이는 삶 자체를 자신과 더불어 끌어 내리시고 그것을 무덤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부활 생명과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자녀로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옛 방식대로 살았을 때에는 거의 속수무책이어었습니다.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반항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런 삶에서 우리가 내놓은 것이라고는 유산과 사산이 전부였습니다.]


스코필드 성경에는 본문의 가서라는 단어가 결혼했다또는 결합되었다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죽임을 당하였으니는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십자가를,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된 십자가의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도 역시 양면성을 띠고 있는 십자가의 진리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떠나서는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위에서 말씀한 주님과의 연합은 고린도전서 6;17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영의 결합인 것을 알 수 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즉 혼의 결합이 아니라 영적인 결합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 때는 부활하신 주님과 우리의 영이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절단하고, 떼어내 버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십자가의 체험적인 결과는 영의 자유함을 가져온다. 원래 영은 혼과 육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의 영은 분성적인 자연인의 생명과 육에 묶여 주님과의 영적인 결합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누가 살리시는 영인가?’ 어떻게 육신에 속한 것들을 잘라 내는가?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어떻게 십자가를 적용하시고, 또 어떻게 우리의 옛 사람의 생명을 죽음으로 넘겨 우리의 영을 해방시키고 그리스도의 영과 결합시키는가?


그 해답은 히브리서 4:12에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은 수술용 메스처럼 날카로워서. 의심이든 변명이든 무엇이나 잘라내고, 우리 마음을 열어서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꿰뚫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에는 빗물질적이거나 만질 수 없는 것들도 쪼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씀은 영적인 무기로서 물질 세계에서 칼로 물건을 쪼개듯이 영적인 영역에서 빗물질적인 것들을 쪼개는 검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쪼개는 역할을 하는 말씀이 바로 십자가의 말씀이다. 곧 이 십자가의 말씀이 혼을 영으로부터 쪼개어 갈라놓는 사역을 하는데, 먼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영과 혼을 조개어 분리시키는 역사를 일으킨다.


십자가의 말씀은 또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하는 데,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자같이 드러나느니라“(13)고 말씀한다. 이 구절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곧 주님 자신이 날선 검을 드시고 우리의 옛 생명을 잘라 버리신다는 사실이다. 오직 주님만이 좌우에 날선 성령의 검을 다루실 줄 알고, 또 우리의 영을 혼의 속박함으로부터 자유케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보아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앤드류 머레이 박사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그이 책에서 성도들 안에서 이루어져할 영과 혼의 분리를 아주 명백하게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영의 지배를 받는 영적인 존재로부터 어떻게 혼적인 존재로, 그리고 결국에는 하느님이 그들의 육체가 됨이라고 하실 정도로 타락한 육적인 존재로 전락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가르친다.


머레이 박사는 인간의 영은 하느님을 알고 의식하는 기관이고, 혼은 자아를, 또 육은 감각을 의식하는 기관이라고 설명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승리하는 풍성한 영적인 삶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서적 심리학까지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죄 이외에도 우리 안에 처리되어야 할 많은 부분들이 있고, 또 죄 이상의 어떤 문제들이 하느님을 아는 영적인 지식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의 생명의 측면에 있는 십자가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우리의 혼과 영이 쪼개어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영이 자유롭게 되어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결할 할 수 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영의 채널을 통하여 주님과 결합하여 한 영을 이루게 되고, 또 살리시는 영이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혼 안에 부활의 능력으로 생동력 있게 역사하게 될 것이다.


또 그 결과로 성도들은 그들의 혼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개성까지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함을 입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낱 로봇이 아니라 하나의 혼이요 인격이 되고, 더 나아가 자연인의 본성적인 생명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영의 지배를 받으며, 그 생명력으로 활동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오직도 동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내적인 생명력의 근원은 이미 바꾸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이 부활하신 주님과 한 영을 이루게 되면, 우리는 영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과 하나로 결합할 때에야 비로소 주님을 인격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진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을 알려하여----”(3:10)


[그리스도를 직접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죽기까지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나는 그 모든 하찮은 것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골로새서 2:6-7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된다. 바울은 그 주님과 연합하여 우리의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주님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한다. 시작도 단순한 믿음을 기초로 한 것같이 이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일도 단순히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부활의 측면에서의 십자가의 의미는 하느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라고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 뿌리를 내리며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뿌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살펴보자. “그에게 뿌리를 박으며나무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나무를 보존한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골로 2:7).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가 결코 움직여서는 안되는 영적 기초와 뿌리로 여겨야 함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을 가지고 전진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곧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분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은 그 안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분 위에 굳건히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하십시오. 수업은 끝났습니다. 배우는 일은 그만두고, 배운 대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감사가 넘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뿌리를 깊게 박자! 십자가를 떠나서는 참된 영적인 생명으로 나아갈 수 없고, 또 십자가를 버려 두고서는 어떤 영적 목표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나무가 땅 속에 뿌리 내리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하느님을 향하여는 산 자로 여기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자. 그 안에 뿌리를 내리자. 또 그 안에 기초를 세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자. 그의 십자가 안에 더 깊이 우리의 뿌리를 내리자!”


이제 요한복음 3:16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생명의 초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거하는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잠시 살펴보자.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어 번역을 보면 저를 믿는 자마다‘believe on Him'이라고 했는데, 사실 그 말은 ’believe into Him'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into)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뉴베리는 그 안에서(into)라는 단어는 원어적으로 운동력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believe into Christ)'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림을 입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러한 일은 갈보리에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 초기부터 십자가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냐 할 필요성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도 예고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그 안에 들어감을 입었고, 또 부활의 측면에 있는 십자가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 안으로 들어감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믿음에 굳게 서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얻게 된다. 이제 그 안에 거하자!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 굳게 서서 세우심을 입자!


골로새서 2:9-11을 보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렇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충만하심 안에 거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겨우 찻잔 하나를 채울 정도의 미미한 충만함이 아닌가? 바울은 이런식으로 충만함이 아니라 그 안에 모든 완전한 충만함이 거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영 안에서 주님과 하나로 연합되어 그 안에 거하게 되었는데, 곧 바다 같은 영적인 충만함 안에 이미 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레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2:11)


[그리스도 안에는 하느님의 모든 것이 표현되어 있어서, 여러분은 분명하게 그분을 볼 수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알고, 또 또 그분 없이는 우주가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망원경이나 현미경이나 점성술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 다가가기만 하면 여러분에게도 그분의 충만하심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은 모든 것에 두루 미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주님 안에 들어감을 입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느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2:12) 여기에 또다시 양면성을 띤 십자가의 진리가 나타나 있다.


[물속으로 들어간 것은 여러분의 옛 삶을 장사 지낸 것이고, 물에서 나온 것은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여러분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던 옛 생활을 고수하던 때에는 하느님께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고, 여러분의 이력이 깨끗해졌습니다. 여러분을 체포하기 위하여 발부되었던 구속 영장이 취소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영적 압제자들의 거짓 권위를 십자가에 폭로하시고, 그들을 벌거벗겨 거리를 행진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역사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일어나며, 육을 잘라 버리는 일, 육적인 몸을 벗는 일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인데, 이는 성령님이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님께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분을 의지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를 완전하게 이루어 주신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세례를 받고 육을 벗을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된다. 그리고 성령은 아주세밀하게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셔서 성령을 좇아 생활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이제 성경 말씀을 두세 군 데 더 살펴봄으로써 부활의 생명 안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십자가의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갈라 6:15)

[이제 우리는 중심을 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누구든지 메시야와 연합하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고, 새롭게 창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옛 삶이 지나가도 새로운 삶이 싹 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느 것도 외적인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 외에능 아무것도 소용이 없고, 쓸모 없으며, 또 중요하지도 않다. 그리스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옛것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면서도 종교의 외적인 예식들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의존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형식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또 그로 인해 다른 하느님의 자녀들과 갈라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과 영적으로 통하고 교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똑같은 한 생명으로 거듭남을 입었기 때문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도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4-6)

[하느님은 한없는 자비와 믿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죄로 죽은 우리 생명을 떠맡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를 들어 올리셔서, 가장 높은 하늘에 메시아 예수와 함께 않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 두시고, 이 세상에서나 정 세상에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쉼없이 쏟아부어 주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뿌리가 있고 기초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치라도 움직여서는 안된다. 또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곧 영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입었고,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우리는 그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는 특권을 얻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로 3:3) 부활의 능력은 일으키는 능력이다. 이제 우리의 영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일으키심을 입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 위에 뛰어난하늘에 함께 앉히우심을 입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육에 묶여 있었든지, 또 혼의 본성적인 생명과 섞여 육체 가운데 행하였든지, 이와는 상관없이 이제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 곳이 우리의 현주소요, 영적인 위치인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그 안에 거하고 안식할 때 주님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여러분의 옛 삶은 죽었습니다. 여러분의 새 삶, 참된 삶은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이 새로운 부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렇게 행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발을 질질 끌며 땅만 쳐다보고 다니거나, 바로 눈 앞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주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오. 정말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그분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십시오]



부활의 생명과 영적 전쟁




마지막으로 부활의 생명에 대한 측면에서 바라본 십자가와 사역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특별히 에베소서 6:10은 영적 전쟁과 관련된 사역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바울은 에베소서의 전반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성도들의 영적인 위치를 진술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영적과 사역과 전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0절은 종말로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데 그 뜻은 지금까지 바울이 서술한 영적 삶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바울은 이미 1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권세자와 능력자들 위에 계심을 선포했다. 주님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역시 주님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앉히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런 놀라운 영적인 위치에 있는 성도들이 이제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고, 확신 있는 일에 거하고, 승리의 위치를 고수하고, 마귀의 꿰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함을 입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또 승리가 확실한 그 위치에서 하느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11)고 바울은 명령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영적인 위치를 깨달은 우리를 향하여 그 안에서 자리를 잡아 너희가 능히 대적할 수 있도록 서”(13)있으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앉아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 내 안에 갈등이 있는데 어떻게 적과 싸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먼저 영적으로 앉아 쉬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인 평화를 잃어버린다면 곧 사탄의 밥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의 비결은 먼저 하느님 안에서 영적으로 조용한 평화를 누리면서 주님 안에 뿌리를 박아 강건하여지고 세움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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