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공사의 함정
오늘의 묵상 (야고보서 2:17)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In the same way, faith by itself, if it is not accompanied by action, is dead)
부실공사의 함정
정치인들은 표를 목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사실 많이 있습니다. 불순한 동기로 시작한 행동은 자랑을 늘어놓으며 오래가지도 않고 역겹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야고보의 지적대로 단순히 행동하는 믿음이면 좋은 믿음이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남을 돕고 좋은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세상의 상식뿐이라면, 구태여 예수를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은 모르게 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행동은 어디가 출발점입니까?
단순한 실천력 부족, 의지의 결단 부족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측량할 길 없는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예수님의 피묻은 복음은 잠꼬대 하다가도 소리칠 정도로 뼈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에도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동기가 중요합니다. 만일 내가 선행을 베풀어서 예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문제중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위로 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내가 선한 행동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야고보서의 행동하는 믿음이 잘못하면 삼천포로 빠질 수가 있다고 심각하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구원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은 순리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 공로를 의지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고 집을 지어야 합니다. 기초공사가 부실한 체로 집을 서둘러 지을 수는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초공사가 부실한지 꼼꼼한지 알 수도 없지만, 사상 누각은 비가 쏟아지면 허망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만세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에페소서 2:8-9)
주님,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이해하고 뼈에 새기게 하셔서, 행동하는 믿음이 거래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