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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사통팔달 주막집 2018. 5. 8. 18:19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우상, 생각보다 휠씬 위험하다(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반한다)

 

내가 만든 신, 평생소원(오래 간절히 바랄수록 우상이 되기 쉽다)

 

당신도 아브라함처럼 그 산을 오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주님, 그것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는데 이제 주께서 저를 그것 없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만 계시다면 제게 정말 필요한 부와 건강과 사랑과 명예와 안전은 다 있는 것이며 결코 잃을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배운 바를 가르쳐 주듯이, 예수님만으로 충분함을 알려면 우선 예수님밖에 남은 게 없어야 한다. 일단 내가 만든 가짜 신을 하나님 아래로 강등시키고 나면 그중 다수나 어쩌면 대부분의 우리 삶 속에 계속 남아 있어도 괜찮다. 이제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불안과 교만과 분노와 충동으로 괴롭히지 못한다.(57)

내가 만든 신, 사랑(사랑에 속고 속다 환멸에 찬 노예가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환멸이 인생 전반에 깔려 있음을 배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누구도 현명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야곱은 레아만 얻을 수 있다면 다 잘 될 것이라고 말했고, 상대가 라헬인 줄로 알고 동침했다. 그런데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29:25) 한 주석가는 이 구절에 대하여 이는 에덴동산 이후로 인류가 경험해 온 환멸의 축소판이다라고 주해했다. (81)

 

당신도 야곱처럼 결혼해서 가장 깊은 희망과 동경의 무게를 전부 상대에게 건다면 배우자는 당신 기대에 짓눌려 쓰러질 것이다. 당신의 삶과 배우자의 삶은 다방면으로 뒤틀어질 것이다. 당신 영혼에 필요한 것을 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최고의 배우자라도 별 수 없다. 당신은 라헬과 동침한 줄로 알겠지만 일어나 보면 늘 레아일 것이다. 이런 인류의 보편적인 실망과 환멸은 삶 전반에 퍼져 있으며, 특히 자신이 가장 희망을 둔 대상에게서 실감된다.(83)

 

돌파구는 출산의 세월이 모두 흐른 후에야 찾아온다.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 그녀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말한다. 이 고백에는 당당한 고백이 묻어난다. 이전의 세 아이를 낳고 선포하던 말과는 다르다. 이번에는 남편이나 아이가 언급되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는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희망을 남편과 자녀에게서 떼어내 여호와께 둔 것으로 보인다. 야곱과 라반은 레아의 삶을 앗아갔으나 그녀는 결국 주님께 드려 삶을 돌려 받았다.(88)

 

이 아이는 유다였는데 창세기 49장을 보면 훗날 진정한 왕이신 메시야가 바로 그를 통해 오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를 찾아오셔서 그녀를 예수님이 나실 계보의 조상으로 삼아 주셨다. 세상에 구원이 임한 통로는 아리따운 라헬이 아니라 아무도 원하지 않아 사랑받지 못한 레아였다. 주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아시고 친히 그녀를 사랑해 주셨다. ‘내가 참 신랑이다. 나는 남편 없는 자의 남편이요 고아의 아버지다. (89)

내가 만든 신, (풍족한 수요와 소비로도 영혼의 헐벗음은 면치 못한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와 은혜가 구약의 신자들보다 많습니까? 적습니까? 대개 여기서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우리가 그들보다 은혜의 빚을 더 졌습니까? 덜 졌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자신의 목숨과 피를 10분의 일만 주셨습니까? 다 주셨습니까? 기독교 신자에게 십일조란 최소한의 기준이다.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행하신 일을 우리보다 휠씬 적게 알았다. (113)

 

예수님은 우리를 보배로 삼으시려고 하늘의 모든 보화를 버리셨다. 우리가 그분의 보배로운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보배로 삼고자 죽으신 그분을 보면 우리도 그분을 보배로 삼을 수 밖에 없다. 돈에서 의미와 안전을 찾던 것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돕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정도만큼 돈은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다. 그분의 값비싼 은혜를 생각하면 결국 우리도 후한 백성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119)

4. 내가 만든 신, 성취(그 어떤 성공신화도 인간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우리가 숭배하는 성공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나아만은 병을 고치려면 차례대로 여종의 말과 엘리사의 종의 말과 자기 종의 말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에 지체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종을 노리갯감이나 노역하는 짐승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종들을 통하여 구원의 메세지를 보냈다. 답은 왕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종의 숙소에서 나왔다. (153)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내내 제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언제 권력을 잡으실 겁니까? 서민 행보를 언제 그만두실 겁니까? 언제 인력 확충과 자금 마련에 나서실 것입니까? 예비 선거일은 언제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섬기다가 고문당해 죽으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분은 당시 아무런 지위도 없던 부류인 여자들에게 맨 먼저 나타나셨다.(154)

 

5. 내가 만든 신, 권력(권력 의지는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분은 인간이 되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모든 권력을 잃고 섬기셨다. 그렇게 죽으셨으나 그 죽음이 구속과 부활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당신도 한없이 연약해질 때 유스터스와 느부갓네살과 예수님처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면 그때 성장하고 변화하고 부활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구주이시다. 그분의 사랑 안에 견고해지려면 우리 죄와 결핍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자비심에 의지해야만 한다. 그러면 새로운 능력을 입되 이제는 남을 압제하지 않게 된다. 정서불안은 사라지고 권력욕은 뿌리가 잘려 나간다. (190)

 

6. 가면 쓴 숨은 신들(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 하나님을 만든다)

진정한 죄책감은 회개와 배상을 통해 사라지지만 어떤 죄책감은 해결이 요원하다.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은 자신이 우상을 실망시켰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정보다 우상의 인정이 더 중요하다. 우상은 우리 삶 속에서 신처럼 행세한다. 따라서 성공이나 부모의 인정을 신으로 삼았다가 실패하면 그 우상이 평생 마음속에서 우리를 저주한다. 패배감을 떨칠 수 없다. (222)

 

요나는 바람과 물의 풍랑 속에 내던졌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최악의 풍랑 속에 내던지셨다. 우리 죄악 때문에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모든 공의와 형벌을 그분이 당하신 것이다. 나는 우상으로 힘들 때면 예수님을 생각한다. 나를 위해 자진해 그 최악의 풍랑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순복하신 그분을 떠올린다. 예수님이 그 끔찍한 풍랑 속에 가라앉으셨기에 나는 인생의 다른 어떤 풍랑도 두려워할 것 없다.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기에 내 삶의 가치와 확신과 사명이 그분에 있음을 나는 안다. 이 땅의 온갖 풍랑이 많은 것과 내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어도 내 생명이신 예수님을 앗아갈 수는 없다. (226)

 

7. 제 자리를 찾아서(전인격이 예수 복음을 통과해야 한다)

우상숭배에 대해 그는 인정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이보다 더 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우리 영혼이 집이라고 가정한다면 방구석 구석마다 우상이 세워져 있다라고도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기 지혜를,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갈망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 평판을 더 중시한다. ---과연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대량생산하는 공장이다. (230)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 우상을 그냥 없앨 수는 없고 대체해야 함을 이제부터 깨달으면 된다. 그냥 뿌리를 뽑으려하면 우상이 되살아나지만 다른 것을 대신 들여 놓으면 해결된다. 다른 것이란 무엇일까? 물론 하나님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를 믿는 막연한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웨만한 사람에게 다 있지만 그들의 영혼에는 우상이 득실거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생생하게 만나는 것이다. (231)

 

여태까지 나는 지독한 바보였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복을 구하되 아버지의 인정과 라헬의 미모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복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보내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죽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없으면 내게 아무것도 없는 거니까요. 다른 무엇으로다 안됩니다.(238)

 

야곱은 왜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 대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연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241)

 

당신은 존재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복을 들었는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씀이 기쁨과 힘의 끝없는 원천인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느꼈는가? 야곱이 말한 것은 바로 그 복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복이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것이 되었다.

 

이것만이 우상숭배를 퇴치하는 묘약이다. 이 복이 있어야만 우상이 필요 없어진다. 야곱처럼 우리도 대개 온갖 엉뚱한 데서 복을 구하며 살다가 그 후에야 이 복을 발견한다. 마침내 이를 발견하려면 대개 다리를 저는 연약함을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수많은 이가 저는 다리로 기뻐 춤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짜들에게 결별을 선언하다(참 하나님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계속 대상만 바뀔 뿐이다)

 



저자는 나의 영혼에 덕지 덕지 붙어있는 우상을 하나하나 찾아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우상의 형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우상이 아니다. 내 마음 내 속에 존재하는 우상이라 찾아내기가 힘들다. 이 우상을 찾아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상은 우리 존재의 가치관과 철학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찾기가 어렵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 기도하는 대상은 사실 이 우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이삭이 우상이었다. 하나님보다 아들 이삭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야곱에게는 라헬이라는 여자가 우상이었다. 그런데 자고보니 라헬이라고 믿었는데 레아였다. 나아만은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병이 있었다. 삭개오는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돈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 예수를 만났다. 느부겟네살 왕은 최고의 권력자이나 원천인 하나님을 몰랐다. 심지어 요나는 사명과는 반대되는 문화와 시대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우상, 은밀한 우상을 섬기면 우상은 결국 사람은 배반한다. 철저히 배반한다. 처절한 배반 실패를 통하여 비로소 우상의 존재를 깨닫는다. 존재의 파괴를 통하여야만 비로소 눈이 열려서 영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우상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이것은 참된 복이 아니다.복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상이 본질이다. 그래서 인생의 힘들고 어렵다. 성경의 인물들은 바로 영혼 안에 은밀히 신앙의 이름으로, 믿음의 이름으로 꼭꼭 숨어있는 우상을 집요하게 드러내는 사례로 가득차다.

 

가장 큰 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이다. 그것은 비밀이다. 이 비밀을 붙드는 사람이 적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다. 그리고 새벽에 그가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아 축복하여 주기를 간청한다. 야곱은 비로소 깨닫는다. 지금까지 추구하여 온 복이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우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 라헬을 통하여 얻는 인생의 행복, 라반을 속여서 얻는 물질의 축복 이 모든 복은 본질적인 복이 아니다.

 

본질적인 복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복이다.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가 변화되는 근본적인 복이다.존재자체가 변화되는 은혜는 막다른 골목에서 얍복강에서 기다린다. 진퇴양난 더 이상 방법이 없는 바로 그 순간이 진정한 복을 아는 복된 순간이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영혼에 들려오는 성령님의 음성이 바로 복의 원천이고 근원이다.

 

레아는 유다를 통하여 진정한 복을 받는다. 예수님은 유다-찬양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

 

우상을 제거하는 방법은 없다. 자르고 잘라도 계속 자라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만 생생하게 만나야만 우상은 저절로 힘이 빠진다. 왕의 위치에서 강등되며 사라져 간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며 마음에 변화와 균열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