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터를 다지라
사랑의 터를 다지라
우리도 바울의 기도처럼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 사랑의 토양에 내 마음의 뿌리를 박고, 그 토양에 잇는 자양분을 다 빨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나의 뿌리를 둘 때 우리는 활기를 얻습니다.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보는 눈이 달라지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말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엄청난 능력이 그 속에 있습니다.
저는 그간 제자훈련을 인도하면서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제자훈련의 성패여부는 훈련생이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제자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물으신 질문도 이것 아닙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 그 사랑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성경지식이 좀 부족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생활한지 몇 년 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만 확실히 알면 바뀝니다. 오래 믿은 사람이 하지 못한 일을 순식간에 해치우기도 하지요.
‘휴, 나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기는 한데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아’라고 생각하신다면 답을 드립니다.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수준이 너무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기쁨과 활기가 없고,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다면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아직 내 마음에 하느님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랑으로 충만히 채울 수 있을까요?
깨달아 안다는 말은 자로 잰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려면 자로 재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의 너비가 얼마나 되는지, 그 다음에는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그 다음에는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마지막으로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자로 재어 보세요.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실어 주도록 큰 이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천사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갑니다. 그곳에는 포로로 잡혀갈 때 훼파되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세 예루살렘 성전이 너무나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의 크기를 하나하나 재어봅니다.고가 얼마, 폭이 얼마, 기장이 얼마, 이런 식으로 측량을 해서 에스겔에게 기록하라고 합니다.
눈대중으로 대충 어림짐작하는 것과 실제로 측량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고 재어보고 확인하다 보면 그 건물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는지 더 깊이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도 자로 재듯이 연구하고, 배우고 검토하는 사람이 먼저 깨달아 알게 됩니다.
“아니 목사님, 사랑을 어떻게 자로 재요? 사랑은 직관적인 거잖아요. 그냥 딱 보면 느껴지는 것데, 머리로 따지고 생각하면 더 복잡해져요.“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이성 간의 사랑과 혼돈하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에로스가 아닙니다. 미인을 보면 저절로 달아오르는 그런 사랑이 아니예요. 남자가 여자를 보면 끌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란 말이죠.
하느님의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자로 재듯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기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학습 장소는 골고다 언덕이요, 학습 자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증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옥한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