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희생하게 하는 힘
십자가, 희생하게 하는 힘
둘째로, 희생하면서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선한 일은 누군가 그 일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법과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를 이루었다면 선조들이 이미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기에 그런 사회가 된 것입니다.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기던 가난한 민족이 자가용을 끌고 다닐 만큼 발전하기 까지는 누군가의 커다란 희생이 있었습니다. 민주화가 이만큼 이루어진 것은 독재 정권 시절에 누군가가 큰 희생을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선하고 옳은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땀과 피, 눈물과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나를 따르라’의 저자 본 히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죽으라고 부르신 것이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닮은 순간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일 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면 이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희생이 없이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 선하고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을 하나도 얻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이 일에 생명을 걸고 희생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대사명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
이 대계명 역시 희생 없이는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청소년부를 맡고 있는 어떤 목사님에게 한 중학생이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목사님, 세상을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복잡해서 편지를 드립니다. 요즘 유명하다, 똑똑하다, 훌륭하다 하는 어른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제 마음이 착잡합니다. 사는 게 뭔지, 정말로 미쳐 버릴 것만 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싫습니다. 많고 많은 나라중에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이렇게 썩어 빠진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린 학생의 눈에 왜 이렇게 비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어느 누구도 자기희생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희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사회가 점점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을 받은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이 1년 동안 매일 묵상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펴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과 아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 아내가 큰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의 순장이라는 분이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내를 찾아와 병문안을 했답니다. 한 번 방문할 때마다 두 시간 이상씩 머물며 위로하고 기도해 주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에 아내는 물론 남편도 놀랐다고 합니다.
그러다 아내가 퇴원하고 나서도 거동이 불편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자, 또 어느 교회의 호스피스 집사님이 2년 동안 매주 한 번씩 방문해서 아내를 위해 기도하고 빨래와 청소를 해주고 장도 봐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온갖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부부가 큰 감동을 받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가운데 예수님의 형상이 심어져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생 없는 곳에 무엇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옥한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