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신앙생활의 본질
십자가, 신앙생활의 본질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하느님에 대해서는 살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느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하느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때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아흔아홉 가지를 철저히 지켰다고 해도 한 가지를 못 지키면 율법을 범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거룩한 하느님 앞에 설 때마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형벌과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이 율법 앞에 선 우리의 처지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피할 길이 무엇입니까? 죽는 길 밖에 없어요. 아무리 부채가 많아도 죽고 나면 갚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빚쟁이에게 쫓길 일도, 형무소에 갈 일도 없게 되지요. 그런데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율법에 대해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음은 율법에 대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다시는 율법이 나를 정죄하거나 저주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이 말은 하느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의인입니다.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아리는 하느님 앞에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좀 더 높은 영적인 경지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입니다. 갈라디아 2장 20절 중간을 보면, 신앙생활이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상생활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생활이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신앙생활이란 내 눈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4복음서의 3분의 1이 십자가의 고난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십자가는 4복음서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서론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복음이란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 역시 십자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떤 줄 아십니까? 승리하시고 재림하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신 예수님이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계실 것 같은데, 놀랍게도 ‘죽임을 당하신 하느님의 어린양’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영원한 과거, 영원한 미래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도 십자가는 영원히 주님의 영광이요, 광채인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 가운데,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는 사실만큼 내게 충격을 주고, 내 가슴을 뜨겁게 하고,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은 사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신한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바로 그분의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기 전까지 그분을 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옳은 말입니다.
또한 탁월한 성경 교사이자 저술가인 에릭 사우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십자가의 죽음은 부활보다 더 중요하다.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알리는 것이라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을 알리는 것이다. 승리없는 정복은 없다.”
주후 1,2세기의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십자가를 잊지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고 합니다. 당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광야와 토굴에 숨어 살던 때였지요. 초대교회의 유명한 터툴리안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발걸음을 앞으로 옮길 때마다,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때마다, 목욕을 하거나 식탁에 앉을 때마다, 등잔의 불을 켤 때나, 침상에서나 좌석에서나 매일의 일상 가운데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십자가가 그들의 삶에 중심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형틀 가운데서도 가장 잔인한 형틀이 아닙니까? 오늘날 미국에서 쓰는 사형용 전기의자를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수형에 쓰는 밧줄모형을 작게 만들어 금박을 입혀 벽에 걸어 놓은 사람도 없습니다. 총살형에 쓰는 집행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명함에 박아 넣을 사람도 없습니다. 유대교의 상징은 다윗의 별이고, 회교의 상징은 초승달이고, 불교의 상징은 연꽃입니다. 다 신비스러우면서도 보기 좋은 상징물인데 유독 기독교는 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형 도구를 교회 위에 달고, 목에 걸고, 벽에 걸어 놓습니까?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는 십자가가 끔찍한 사형도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십자가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하느님의 사랑을 확증해 줍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는 십자가 없는 복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는 고난주간을 폐지하고 부활주일만 요란하게 지킨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만큼 천박해집니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영원한 것보다는 세상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타락한 신앙생활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가 직면한 재앙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다, 옥한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