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쟁이가 된 점장이 (1)
명복’으로 이름 날린 ‘백장님’
맹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백사겸의 삶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남 평원군 순안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아버지가 별세하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홉 살 때 열병을 앓다가 실명했고, 1년 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형이 하나 있었는데 졸지에 고아가 된 형제는 거지가 되어 구걸로 연명했다. 그러기를 2년, 성년이 된 형이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더 이상 형의 손을 잡고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백사겸은 달리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시 맹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복술업’즉 점(占) 치는 일이었다. 형은 동생에게 학비를 대줄 테니 점술을 배우라고 했다. 마침 마음씨 좋은 복술가가 이들 형제의 딱한 사정을 알고 학비를 반으로 깎아 주었다. 백사겸은 4년 공부 끝에 ‘승어사’(勝於師, 스승을 뛰어 넘는) 경지에 이르렀고,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산통(算筒)과 죽장을 갖고 고향을 떠났다.
가까운 평양으로 가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동강변에 자리를 펴고 점치기 시작했는데 워낙 눈치가 빠르고 말재주가 능해 금방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평양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울로 왔다가 다시 이천과 원주를 거쳐, 서울 근교 고양읍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이십 년 가까이 점을 치다보니 ‘고양읍 백장님’하면 ‘명복(名卜)이다’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양반 집에서 가마를 보내 초청할 정도였다. 그 사이 결혼해 아이도 낳았고, 돈도 많이 벌어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알고 보면 그의 직업은 눈치로, 현란한 말재주로 남을 속이는 일이었다. 직업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당시 불안한 시국 상황도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풍문에 나라 사정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혹세무민하는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항거하는 민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힘없는 백성들은 이리 터지고 저리 쫓기는 난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운명에 불안을 느껴 찾아 온 사람들을 속여 돈을 뜯어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괴로웠다.